니나리치 래르뒤땅, 파우더리한 비누향 무난한데 특별한 향수 -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
니나리치 래르뒤땅 향수는 제가 10년도 더 전에 정말 잘 썼던 향수입니다.
지금은 공병상태로 저는 지금까지 한번도 같은 향수를 또 써보고싶다 느낀 적이 없는데, 이 향수만은 꼭 다시 쓰고싶다고 생각하는 향수입니다.
향의 특징을 그냥 간단히 요약하자면 '파우더리한 비누향이라 무난한 것 같은데 절대로 무난하지 않은 특별한 향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향수를 사용하게 된 계기는...
제 기억이 맞다면 예전 명동에 이 니나리치 매장이 있었답니다.(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그 매장에서 다른 향수를 찾다가 이 향을 시향하고 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친구들이랑 중국여행으로 면세점에서 어떤 향수를 시향했는데, 바틀이 사과같은 모양에 상큼한 향이었고 풋사과 느낌이 나는 수색이었습니다. 여행을 시작했던 참이라 그 향수를 살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끝내 사지 않았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향수가 두고두고 생각이 났습니다. 근데 아예 안사기로 맘을 먹었던 참이라 향수 이름도 브랜드도 알아두질 않아서 한국에서 검색으로 찾아봤던 것 같아요. 사과모양 향수를 찾았더니 니나리치 브랜드가 검색이 되길래, 제가 봤던 향수랑은 같지 않았지만 일단 명동의 니나리치 매장으로 갔습니다.
매장에서 사과같은 모양의 향수를 모두 시향을 해도 제가 면세점에서 느꼈던 향은 느낄 수가 없었어요. 직원분이 다른 향수 시향도 하게 해줬는데, 마침 이 래르뒤땅 향이 꽤 괜찮은 것 같아서 그자리에서 바로 구매를 했던 것 같아요.
사실 향수는 시향을 했더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를 하는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당시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거 같아요. 시향용지에 시향을 하지 않고 실제로 내가 뿌리는 방식으로 향수를 뿌린 후 하루 내내 돌아다녀보고 다음날이나 그 이후에도 향이 좋으면 향수를 사는게 제일 만족스럽게 끝까지 향수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알면서도 시향없이 바로 구매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뭔가 소유욕이 합리성을 뛰어넘는 그런 순간들이 오곤 하거든요.
니나리치 래르뒤땅 향
이 향은 뭔가 어린시절이 떠오르는 향입니다. 왠지 어릴때 맡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향이에요. 하지만 생각하면 딱히 떠오르는 관련된 기억은 없습니다. 뭔가 비슷한 계열의 향이 있었던 것 같긴한데, 뭔지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려운 그런 향이에요. 어쩌면 많은 분들이 저랑 비슷한 느낌을 갖을 것 같아요. 그래도 굳이 비슷한 느낌을 말하자면, 한 20년 전쯤에 뉴트로지나 로션에서 났던 냄새와 비슷합니다. 친한 언니가 그 로션을 자주 발랐는데 향이 좋아서 몇년 있다 문득 그 향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로션을 따라 샀는데 향이 변했더라고요. 존슨즈 베이비로션도 그렇고, 뉴트로지나도 그렇고, 예전 보령 메디앙스 바디로션도 그렇고... 향이 다 변해버렸습니다. 대체 왜 향을 바꾸는건지...
아마 이 향을 베이비파우더 향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파우더리하고 보송보송하고 비누향 같은 느낌도 나서 그 느낌을 모두 조합하면 뭔가 상당히 고급지고 특별한 향의 베이비파우더 느낌이 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베이비 파우더라기엔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인 것 같아요.
저는 향을 과일향, 꽃향, 비누향이나 그 외의 인공적인 향으로 나누는데, 이 그룹핑에서 래르뒤땅 향수는 비누향 혹은 그 외의 인공적인 향 그룹에 속합니다. '인공적'이라고 하니 뭔가 느낌이 괜히 안좋은데, 흔히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과일향이나 꽃향과 같은 느낌은 아니라는 의미에요. 근데 향 자체는 너무 강렬하지도 않고, 너무 약하지도 않아서 인간의 살냄새랑 자연스럽게 섞여드는 향입니다. 그래서 아마 이 향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싶은 향이에요.
향을 좀 더 분해하자면, 살짝 달달한 향인데 먹을 수 없는 달달함의 느낌이고, 첫향은 은은한 비누향으로 다가왔다가 끝부분이 너무 부담스럽게 텁텁한 파우더리함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적당한 파우더리함이 있습니다. 가끔 파우더리한 향의 값싼 향수나 바디로션 냄새를 맡아보면 파우더리함이 너무 증폭되어서 화장지 냄새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거든요. 그 화장지에서 나는 종이 파우더 혹은 종이 먼지 냄새 같은 향이 너무 극대화되면 질리기도 하고, 느끼해질 때가 있어서 파우더리함은 정도의 조절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뭐.. 모든 향조의 조합이 다 그렇긴 하겠죠.
약하게 달달하고 고소한 향이 있는데, 먹을 수 있는 느낌이 아닌... 그런 향을 혹시 아실까요? 암튼 저는 이 먹을 수 없이 달달하고 고소한 향의 느낌의 대표적인 냄새가 치자꽃 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래르뒤땅이 그런 계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꽃향 계열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이런 느낌때문에 향을 비유하긴 어렵지만 친숙한 느낌이 드는 향이에요. 저는 달달한 향을 맡으면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런 면에서 이 향수의 친숙함이 오는 부분도 있습니다.
제품 설명에 따르면
탑노트는 카네이션과 치자나무 꽃
미들노트로는 재스민, 장미부케향
베이스 노트는 흰붓꽃, 샌달우드향이라고 합니다.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가 치자꽃 계열이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맞았네요. 왠지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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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향으로 시작해 파우더리함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이 향수는 기본적으로 깨끗하고 보송한 느낌이 있습니다.
엄청 달콤한 향도 아니라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하면서 깔끔한 느낌이 드는 향수에요.
그래서 굳이 나이를 가리지 않고 단정한 느낌의 옷차림을 하는 사람이 뿌려주면 잘 어울릴 것 같은 향수입니다.
주로 여자분들이 뿌릴 것 같은 향수이지만 그렇다고 엄청 여성스러운 향도 아니고 포멀한 느낌의 향도 아니어서 다른 향수들보다 좀 더 편안하게 옷차림이나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고 뿌리기 좋을 것 같은 향수에요.
그래서 그런지 이 향을 '지적인' 느낌이 난다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모르고 사서, 잘 뿌리고 다녔지만 알고보니 이 향수가 예전 영국의 다이애나비가 애용했던 향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옛날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이 주인공인 조디 포스터에게 이 래르뒤땅의 향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꽤 유명한 향수였어요.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저도 이제 이 향수의 향을 맡으면 뭔가 성숙한 대학생, 대학원생, 연구원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뭔가 영화 속에서 조디 포스터의 지적인 느낌과 다이애나 비의 너무 여성스럽지 않은 이미지가 조합되어서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향수는 뭔가 어린 학생은 아니고 대학원생 정도의 성숙한 사람이 공부하기 편안하면서도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의 옷을 입은 모습이 떠올라요. 가슴에 무슨무슨 칼리지, 이런게 영어로 씌어있는, 살짝 청색이 도는 밝은 회색의 후드티를 청바지 혹은 남색 면바지에 깔끔하게 입고 막 씻은 듯 기숙사에서 서둘러 나오는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에게서 날 듯한 향?ㅋㅋ
하지만 이건 제가 혼자 떠올리는 이미지이고, 이 향은 대체로 어느 옷차림에나 무난하게 어울릴 것 같은 향입니다.
사실 남녀노소도 별로 가리지 않고 뿌려도 좋을 것 같은 향이에요.
남자분이 뿌린다면 상당히 섬세한 느낌이 날 것 같긴 합니다. 그래서 남자분이라면 이삼십대 정도에 어울릴 것 같아요.
기타 주변 이야기
니나리치 브랜드는 엄마와 아들이 함께 설립한 브랜드로 프랑스의 100년이 좀 안된 브랜드입니다.
향수의 바틀은 당시가 2차 세계대전 이후라 평화와 희망의 뜻으로 비둘기를 올렸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비둘기의 부드러운 이미지와 향이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어떤 값비싼 향수는 그 값에 비해 바틀이 좀 실망스러운 경우가 있는데, 이 래르뒤땅의 경우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 디자인입니다. 비둘기 이미지가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살짝 고풍스러운 느낌도 있고요.
L'Air du Temps는 프랑스어로 직역하면 '시간의 공기'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브랜드마다 상징적인 향수, 특히 개발된지 오래된 유명한 향수는 그 향수가 개발된 당시의 분위기나 유행 같은걸 짐작하게 하는데... 아마 예전 향수는 특유의 파우더리함과 비누향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당시 향수의 기술이 일괄적으로 비누향이나 파우더리한 향수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당시는 지금보다 물자가 귀하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성공적인 향수, 그러니까 안전빵인 향수를 개발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과거에 개발되었던 향수가 지금까지도 클래식하게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이 니나리치 래르뒤땅 향수 리뷰를 하면서 들었어요.
니나리치 향수의 니나 시리즈는 사과 모양 바틀로 유명한데, 아마 제가 중국가는 길에 면세점에서 봤던 향수가 이 니나 시리즈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다른 여러 향수랑 향이 섞이는 바람에 해당 향수를 못찾은게 아닐까 싶고요. 한편으로는 만약 그 면세점이 중국이었더라면... 어쩌면 니나리치 짝퉁 향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그 향은 이제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저는 찾고 싶은 향이 몇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어릴때 꽃이 그려진 스티커에서 났던 향이고. 달달하고 친숙하면서 아기들이 씹는 풍선껌 같은데서 날듯한 향이었어요. 계통은 과일향일 것 같은데 너무 달진않지만 참 달콤했습니다. 몇십년이 지나서 맡아도 그 스티커에서는 꾸준히 냄새가 났는데, 지금은 그 스티커 붙은 책 마저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제가 학생때 언니의 화장품 다발에서 미니 향수가 깨졌는지 해서 향이 났는데, 그때 창가에서 바람이 훅 불면서 그 향수냄새때문에 순간 제가 다른 세계로 날아간 것 같은 향이 났습니다. 제 짐작으로 그 향은 어쩌면 향수 샘플에서 났던 것 같은데, 그 샘플비닐에 마치 물에 뜬 기름처럼 다양한 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던게 기억납니다. 향은 꽃향에 가까웠는데 무척 풍성했고, 뭔가 머릿결이 엄청 풍성한 긴 웨이브 머리의 요정이 머리를 쭉 부채꼴로 바닥에 펼쳤을 때 날 것 같은 샴푸향 냄새 같았습니다. 너무 찾고 싶은데, 찾을 방법이 없다는.
다른 냄새는 명동에서 한창 쇼핑하다 소매에 뿌려본 향이었는데, 당시 워낙 이것저것 향을 뿌려서 알 수가 없었던 상큼하면서도 앙큼한 느낌이 드는 향이었습니다. 역시나 꽃향계열이었는데 약간은 인공적인 꽃향이라 어린 느낌이 나는, 그래서 10대나 20대 초반의 소녀소녀한 느낌의 여자분이 뿌리면 좋을 것 같은 향이었어요.
첫번째 두번째 향은 진짜 지금까지도 너무 찾고 싶은데,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암튼 저는 조만간 이 니나리치 래르뒤땅을 추가로 구매해야할 것 같습니다.
향수 리뷰를 하면서부터 다시 이 향수를 다시 뿌리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커져버렸거든요.